이사림 작가 소설 ‘땅 끝에 선 연인’ 22년 만에 복간

이사림 작가 소설 ‘땅 끝에 선 연인’ 22년 만에 복간

  • 오은정 기자
  • 승인 2014.04.1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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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림 작가 소설 ‘땅 끝에 선 연인’ 22년 만에 복간

작가 이사림의 본명은 ‘이재하’다. 충분 제천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대 초 미국에 건너가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동서양 경제 교역에 일익을 담당하면서도 저작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국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그는 언제나 ‘문학이야말로 자신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소설 ‘땅 끝에 선 연인’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92년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해드림 출판사에서 책을 복간하는 그의 감회는 예사롭지 않다.

그는 “본 작품이 출판된 지 이십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 중판을 내면서 새삼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하는 회고적인 물음과 동시에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하고 미래에 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잠시 감성적인 혼동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내가 살아온 삶의 공간 속에 그런 갈등의 감성은 다 녹아들고 말았다. 삶이란 끝없는 이별 연습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살아왔고 미완성의 자아를 애증으로 끌어안을 수밖에는 없는 운명적인 시간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린 후에 다가온 절망을 그래도 내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으로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의 생존 가치에 대한 소중함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애정과 연민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을 한 저자는 애정에서부터 비롯한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도를 자신의 작품 속 인물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 질문에서부터 이 책의 중판은 시작됐을 것이고, 그것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픈 저자의 따뜻한 심정을 담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에게 ‘애정과 연민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하고 싶다.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 분명 그는 이러게 대답할 것 같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허구의 세계에서 각자 자신의 가치관을 완성하고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고 말이다.

그는 “그래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내 젊은 날의 부서진 사유의 조각을 꿰어 맞추면서 상대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하여 고독한 자유인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아직도 이는 진행형이다”고 밝혔다.

반복해서 엇갈리는 연인의 인연

소설의 줄거리

지구의 최북단 알라스카에서 재회와 이별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남녀의 비극적인 로망스는 스스로가 유배지로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여주인공 “엔지(연지)”의 자살로서 마무리되지만, 그녀는 사후에 어둠을 지배하는 “흑조”(에스키모어: 블랙 카와가닌-Black Kawakanin)가 되어 주인공 박재만을 영혼으로서 맞이하겠다는 유서를 남긴다.

한국에서 온 박재만은 서울의 한 여고에서 체육선생으로 재직할 때 고적대 지휘자였던 여고생 연지와 피치 못 할 열애를 하게 되지만 연지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교직에서 물러나고 연인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연민의 깊은 상처를 안고 헤어진 연인의 운명적인 첫 번째 재회는 연지가 간호보조사로 일하던 산부인과에서 재만의 부인이 첫아이를 낳음으로서 이루어진다. 연지는 헤어진 애인의 첫아이의 조산을 담당한 간호사가 됐다.

두 번째 재회는 재만이 어느 무역회사의 간부직원이 되어 일본인 바이어를 접대하는 사직동 요정에서다. 연지는 기생이 되어 자리를 함께한다. 이때 연지가 주연에 나타난 것은 일본인 바이어 나까야마 진따로가 한국방문 때 마다 기생이 된 연지를 끈질기게 좋아하고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세 번째 재회는 재만이 미국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알래스카로 임시 이주하는 과정에서다. 앵커리지에 살고 있는 미국인 친구 폴에게 들르자, 그는 활어선 판매상을 하는 한국인 지인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연지다.

그들은 유배지에서의 만남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미래를 꿈꿔보지만, 그때 연지는 이미 미국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자라는 딸을 두고 있었고, 미국 본토 버지니아에서 결혼생활을 실패하고 이곳 알라스카로 이주하여 사슴목장을 소유한 죠오지라는 에스키모 사내 와 재혼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울적한 북극의 긴 겨울밤을 보내면서 뜨거운 사랑의 열기를 느끼고, 북극의 산림평원에서 백야의 로망스를 가져보지만 끝내는 백야에 피어나는 물망초 같은 사연을 남기고 흑조가 되어 이별을 한다.

이국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소설의 배경은 알래스카다. 저자는 낯선 이국땅의 모습과 그 곳에 놓인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대지진으로 지반이 내려앉은 해안 도로변에는 잿빛으로 죽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거나 그대로 우뚝 선 채로 즐비했다. 한참 동안 대화가 중단된 채 달리다 보니 빙산이 뒤덮인 계곡을 지나면서 수정처럼 투명한 빙벽이 마치 무대의 세트 장면처럼 시야에 펼쳐졌다.

한 시간 정도 다시 산림 사이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지나 작은 포구에 자리 잡은 조용한 어촌을 가로질러 방파제에 이르자 그녀는 차를 멈추었다. 포구 건너편에는 병풍처럼 드리운 숲이 울창한 가파른 산은 무대 위의 배경처럼 시야에 가득히 밀려왔고 해수면의 차가운 한기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춥지 않으세요?” “한기는 있어도 상쾌하군. 아주 아늑해 보이는 곳이데.”

“언제나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포구예요. 그러나 이곳도 수난의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하지요.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지배하던 때에는 러시아 함대가 출입하며 원주민들로부터 자원을 착취해 가는 기지로 사용했나 봐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요지로 사용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전경을 보니 전혀 그런 사실에는 실감이 가질 않는군.” “저도 동감이에요.” “저기 건너에 보이는 산이며 떠오르는 달 모양이 마치 연극 무대의 세트 같군” “알래스카를 여행하다 보면 가는 곳마다 태고의 원시적인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듯한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따금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누가 먼저 말머리를 끄집어내든 필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감당 못 할 것 같은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올 것 같았다.

“선생님?”

그녀는 정색한 표정으로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깊고 커다란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듯 떨려왔다.

- 본문 중 ‘노을 속에 피어나는 모닥불’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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