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진관사 태극기’ 展

서울역사박물관, ‘진관사 태극기’ 展

  • 박현숙 기자
  • 승인 2010.02.2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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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에서는 3·1절을 맞이하여 ‘진관사 태극기’전을 2월 26일부터 3월 14일까지 개최한다. 이 전시는 2009년 새롭게 발굴되어 등록문화재(제458호)로 지정된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항일독립신문’을 최초로 공개하는 특별전이다.

새롭게 발굴된 진관사 태극기

이번에 전시되는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5월 26일(화) 오전 9시경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 해체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의 해체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되었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이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의 국기와 비교하면 리·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는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동일하다. 태극은 청·적색이고, 현재의 국기를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발견 이후 보존처리를 거쳤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는 여러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태극기가 발견된 경우는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현재까지 유일하다. 진관사에서 나온 항일독립운동 신문과 태극기 등 독립운동 관련 자료는 일제강점기 한국불교계 항일운동의 자취를 보여 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특히 사찰에서도 인적이 드믄 칠성각에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점은 당시 불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항일운동이 얼마나 절박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日章旗)위에 덧그려졌다는 점이다. 이는 일장기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한편 태극기 속에는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발간된 지하신문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간행된 신문이 둘둘 말린 채로 함께 발견되었다.

태극기에 싸인 독립운동사 자료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운동사 사료는《신대한新大韓》 3점, 《독립신문獨立新聞》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 등 6종 20점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태극기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주목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제30호에는 시‘태극기’가 있고, 제32호에는 태극기의 의미와 제작법을 제시한 ‘태극국기신설太極國旗新說’이 게재되어 진관사 태극기 제작 방식은 이 지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경고문’(1919년 6월)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편에 선 세력들이 벌인 ‘자치운동’ 등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격문의 말미에 실린 ‘萬歲’를 부르짖는 표어는 태극기가 교차된 그림으로 장식하였는데 진관사 태극기의 4괘와 모양이 동일하다. 그 밖의 신문자료들도 태극기의 도안을 싣고 있거나 태극기 게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재조명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

그렇다면 누가 칠성각의 기둥 사이에 태극기를 숨겨놓았을까? 이 물음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승려 백초월 이다. 백초월(白初月, 본명 寅榮, 1878~1944)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4세에 영원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영원사, 해인사에서 수행한 이후에는 영원사 조실, 범어사 강사를 역임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1운동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을 대신해 불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백초월은 국내와 임시정부를 왕래하던 항일승려들을 진관사에서 만나고, 불교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는 진관사와 진관사 마포포교당을 근거지로 삼고, 전국 사찰을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백초월은 진관사에서 보살계 법회를 통해 군자금의 모금, 제2의 3?1운동 추진, 임정의 독립신문과 비밀 지하신문을 배포하였다. 진관사 태극기는 함께 발견된 신문류의 발간일을 놓고 볼 때 그가 진관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919년 숨겨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초월은 1939년 진관사 마포포교당에서 기거하였던 용산철도국의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 3년간 구속당했다. 출옥 후에도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형무소·대전형무소·청주형무소 등으로 이감 전전되다가 1944년 6월, 66세를 일기로 청주형무소에서 옥사·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백초월의 독립유공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독립운동 현장에 쓰였던 태극기로 보이며 우연히 발견되기 까지 9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벽 속에 숨겨져 있었다. 진관사 독립운동 유물의 발견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애국선열의 숨결이 느껴지는 독립운동사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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