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많은 우리 시대 사내의 이야기…이기원 씨의 ‘바람 나그네’ 출간

한(恨) 많은 우리 시대 사내의 이야기…이기원 씨의 ‘바람 나그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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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2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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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이 공존하기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 세상. 그곳은 훈훈한 남동풍이 불기도 하고 살을 에는 듯한 북서풍 칼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한다. 세상의 한파가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요즘, 거친 파도를 헤치며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오랜 군생활을 바탕으로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 작가 이기원의 ‘바람 나그네’(도서출판 한솜)이 그것.

이 책은 해방 직후 사생아로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에서 모진 운명을 이겨내 성공을 이룬 위인의 일대기도 아니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삶의 기록도 아니다. 가장 평범한 남자의 삶, 어쩌면 우리 아버지 세대 대부분의 남자가 겪었을 인생 여정이 진솔하고 담담하게 서사되어 있다.

새벽 4시가 넘어 심야 할증이 풀리는 시간이 되었건만 도무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한 평 남짓의 보금자리가 없어 전깃줄에 걸쳐 앉은 새처럼 동이 터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동이 트면 날개를 퍼덕여 푸른 창공으로 솟으려는지 모른다. 아니면 가장 거리가 먼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나름대로의 추억 여행을 즐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행인들을 의식한 듯 까만 모자를 눌러쓴 채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또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 9쪽)

해방 직후 물장사를 하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달구’는 괄괄하게 타고난 성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을 자처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리더십은 뛰어났지만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이유는 어머니의 재혼.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 중 하나와 결혼하여 새 살림을 차리게 된 어머니는 달구에게 대학 진학을 제안하고, 달구는 그때부터 집과 떨어져 서울에서 혈혈단신의 생활을 시작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태풍에 휘말려 해저 암석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달구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조용히 대문을 열고 나와 골목길을 재촉했다. 가로등을 오른쪽에 끼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시간은 거의 자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저 한참을 걷다 보니 ‘흑장미’ 골목이 나타났다. 연어처럼 회귀 본능일까?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스스로를 이끌었는지 모른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손님도 보이지 않는 ‘흑장미’엔 색시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미스 진이 문 닫을 채비를 하고 있다. (-본문 28쪽)

달구는 철모를 시절 어머니의 가게에서 정을 통한 연상의 미스 진과 대학에 들어와 만난 윤희 사이에서 감정의 갈등을 겪는 한편, 군대를 다녀와 복학 대신 생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선택한다.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를 거쳐 거칠고 텁텁한 내음 가득한 청년기까지의 이야기는 달리기를 하듯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윤희와의 결혼에 골인하지만 그 뒤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다.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돈 때문에 자식보다 남자를 선택한 어머니에 대한 결핍감으로 달구는 가정을 지탱할 돈을 벌기에 급급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등한시하게 된다. 자신이 절대 걷지 않기로 했던 길,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것 같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달구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아내로 인해 이혼을 당하고 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해보기도 한다. 거리에서 달팽이처럼 몸을 쭈그리고 자야 하는 신세로 노년을 맞지만,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남자, 바람에 휩쓸리면서도 꿋꿋이 땅에 발바닥을 붙이고 살아온 인생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더불어 ‘바람 나그네’에는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역사가 담겨 있다. 해방 직후와 전쟁, 격동의 80년대, 90년대 말의 경제 공황, 그리고 현재의 연속선인 21세기까지 인생의 마라톤을 달려온 한 사내의 생은 어둡고 침체된 경기와 더불어 황량해져 버린 독자들의 마음속을 나직이 쓰다듬어 줄 것이다. ‘괜찮다’고. 강해지지 않아도, 온전히 혼자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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